Aesthetic Value

우리는 “아름다움”에 끌립니다.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아름답다”는 관념이 작용하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는 것에 우리의 신체가 움직입니다. 외부의 강제적인 장치가 아니라 내면에서 스스로 “아름다움”을 찾아 행동합니다.

18세기 계몽주의자들이 “아름다움”을 연구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아름다움의 관념에 끌리는 인간 행동의 패턴, 습관을 통해 사회가 변화되기를 간절히 바랐죠. 하지만 종교 개혁 이후 중앙집권적 종교 생활이 해체된 이후, 분산적이고 개개인적 믿음 생활이 퍼지는 시대에, 통일된 “아름다움”의 관념 또한 다양해졌습니다.

근대 계몽철학자들은 인간 사회를 관찰하며 다양해 보이는 “아름다움”에서도 일정한 원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인간의 공통의 본성, 감각기관 등의 요소들입니다. 이러한 공통의 요소가 사람들 사이에서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서로에게 “즐거움”을 느끼게 합니다.

“이 즐거움을 이용하자!”

사람들의 마음에 자연스럽게 변화를 촉구하는 하나의 학문으로 “미학적 가치”는 이용됩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무엇을 느끼는가는 사람마다 다르게 보이지만 공통된 요소가 있습니다. “아름다움”의 관념이 주는 “즐거움”을 쫓아 자신을 바꾸고 사회가 보다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좀 더 지혜롭게 사고하고 행동할 필요가 있습니다.

Aesthetic Value

We are drawn to “beauty.” It is difficult to define exactly what beauty is, but our bodies respond to the “pleasure” induced by the notion of “beautiful.” We act on our own to seek “beauty” from within, not through external coercion.

This is one of the reasons why 18th-century Enlightenment thinkers studied “beauty.” They fervently hoped that the patterns and habits of human behavior drawn to the idea of beauty would transform society. However, after the Reformation, when centralized religious life disintegrated and decentralized, individual faith practices spread, the unified notion of “beauty” also diversified.

Modern Enlightenment philosophers observed human society and realized that even in the seemingly diverse “beauty,” there are certain principles. These include common human nature, sensory organs, and so on. These common elements evoke “sympathy” among people and create “pleasure.”

“Let’s use this pleasure!”

“Aesthetic value” is used as a field of study to naturally encourage change in people’s minds. Even today, while it may seem that what we perceive as beautiful differs from person to person, there are common elements. To pursue the “pleasure” that the notion of “beauty” provides, we need to think and act more wisely to change ourselves and move society towards a better direction.

어디에서 환희를 느끼시나요?

“눈물이 날 정도로 환희를 느낀 적이 있나요?”

저에게는 인생의 여러 시기에 많은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기억나는 장면은 한 장의 사진처럼 단편적이고 정적이지만 그 느낌은 확실히 떠오릅니다. 그리고 환희를 느끼게 하는 계기는 매번 달랐지만 감정을 느끼는 주체인 ‘나’는 동일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양하게 ‘보이는’ 현상들 속에 어떤 공통적 속성이 존재하고 거기에 내 감각이 반응해서 동일한 감정을 느낀 건 아닐까요? 이러한 경험적 추론에서 저는 제가 어디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고찰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의 감각이 언제 어디에 반응하는가?”

이 질문을 하면서부터 자신의 성향을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아! 나는 혼자 있을 때 안정감을 느끼는구나

아! 나는 누군가와 공통적인 주제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구나

아! 나는 책을 읽을 때의 만족감이 크구나

아! 나는 하나님을 경험할 때 환희를 느끼는구나

어릴 때부터 내가 모르는 사이에 축적된 감각의 지식과 성향은 현재의 나의 삶 속에서 여러 가지 생활패턴으로 나타납니다. 그중에서는 스스로가 만족하는 행동도 있을 것이고 고치고 싶은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자신이 ‘무엇에 즐거움을 느끼는지 파악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 알게 된다면 자신만의 방법으로 자신만의 장점을 끌어내면서 현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저도 MBTI를 해보고 대략적인 성향을 파악했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성향을 알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돌아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각자의 경험과 지식을 통해 얻은 즐거움이 각양각색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뻔한 대답을 들으면 안정감은 느낄지라도 상대방과 대화를 지속하고 싶지 않다.

일본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일본사회에는 수 많은 언어가 상황에 따라 정해져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決まり言葉”

(키마리코토바, 정해진 말, set phrase)

특히 회사원이라면 피부에 와닿을 정도로 정해진 말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거래처 사람에게 메일을 보낼때 서두에는 

“いつもお世話になっております”

(이쯔모오세와니낫떼오리마스, 항상 신세 지고 있습니다, appreciate your ongoing support)

꼭 이런 문구로 시작합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일본인의 “優しさ”(야사시사, 친절함, kindless)을 느낄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방을 지나치게 생각하는 언어 습관은 개인의 개성이 드러나지 못하게 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시킵니다. 특정 상황에서의 정해진 말은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생각보다 그 상황에 맞는 단어를 찾으려고 하는 사고의 습관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의 감정을 촉발시키는 “호기심”을 자극시키지 않는다. 즉, 뻔한 대답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인간적 감정을 배제시키는 동시에 대화의 즐거움을 뺏아버린다. 

자신만의 언어를 사용해 상대방에게 자신의 생각을 잘 전달 할수 있도록 우리는 훈련해야한다. 먼저는 가까운 사람들부터 해보는 거를 추천합니다. 오늘 저녁식사는 티비를 끄고 가족과 오늘 있었던 일들을 공유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