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적극적인 삶의 태도에서 신앙의 진가를 발휘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는 초대교회 시절 안디옥 교회의 사람들을 믿지 않는 이들이 부르던 별명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과 삶의 목표와 방식이 다른, 다소 독특한 집단을 가리키는 표현이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라이프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특정한 예배 형식을 가졌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 불렸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의 다른 삶의 가치관과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물질적인 풍요를 추구하기보다 사랑을 실천하며, 자신의 유익보다 타인의 유익을 구하는 구체적인 삶의 행동들은 당시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되지 않았던 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다른 가치관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삶에 대한 그들의 적극적인 태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강한 신앙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적극적이고 초자연적인 기적을 통해 그들에게 부어진 성령은 강력한 믿음과 공동체를 형성하게 했고, 이는 자연스럽게 신앙 공동체로 이어졌습니다.

교회는 특정한 예배를 드리고 모인 공동체를 뜻합니다. 하지만 신앙 공동체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적극적인 삶의 태도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장 회복해야 할 것은 바로 개개인의 신앙 회복입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건강한 믿음이 나타나기를 기대합니다.

Christians embody the true essence of faith through a proactive approach to life.

The term “Christian” was originally a nickname given by non-believers to the members of the Antioch Church in the early church era. It referred to a peculiar group whose life goals and ways differed from their own. In other words, Christians lived a lifestyle distinctly different from that of non-believers.

They were not called “Christians” because of any specific worship practices. Rather, the term was derived from their unique values and attitudes toward life. Their actions—prioritizing love over material wealth and seeking the benefit of others rather than their own—were difficult for others to comprehend.

How, then, were Christians able to hold such values? Their proactive attitude toward life stemmed from a strong faith in Jesus Christ as their Lord. Through God’s active and supernatural miracles, the Holy Spirit was poured out upon believers, forming strong faith and communities, which naturally gave rise to faith-based communities.

A church refers to a community that gathers for worship. However, the essence of a faith community lies in the proactive attitude of those who believe in Jesus Christ. The most crucial task today is the restoration of individual faith. When this happens, we can expect to see a vibrant and healthy faith reflected in every area of our lives.

クリスチャンは積極的な生き方を通じて信仰の真価を発揮します。

「クリスチャン」という言葉は、初代教会時代、アンティオキア教会の人々を指して、信じていない人々がつけたあだ名でした。彼らの人生の目標や生き方が自分たちとは異なる、少し風変わりな集団を指す表現だったのです。つまり、クリスチャンは信じない人々とは異なる独自のライフスタイルを持っていました。

特定の礼拝形式を持っていたから「クリスチャン」と呼ばれたわけではないでしょう。むしろ、彼らの異なる人生観や態度を見てそう呼ばれたのです。物質的な豊かさを求めるのではなく愛を実践し、自分の利益ではなく他者の利益を求める具体的な行動は、当時の人々には理解しがたいものでした。

では、クリスチャンはどうして世間と異なる価値観を持つことができたのでしょうか? 彼らの積極的な生き方は、イエス・キリストを主として信じる強い信仰から生まれました。神の積極的で超自然的な奇跡によって信じる者たちに注がれた聖霊は、強い信仰と共同体を形成させ、それが自然に信仰共同体を生み出したのです。

教会とは、特定の礼拝を行い集まる共同体を指します。しかし、信仰共同体の本質は、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人々の積極的な生き方から自然に生まれる現象です。今、最も必要なのは個々人の信仰を回復することです。それによって、私たちの人生のあらゆる分野で健全な信仰が現れることを期待しています。

목적 없는 자기계발의 한계

한국이든 일본이든 어느 서점을 가더라도 자기계발서 코너에는 항상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은 자신의 삶에 변화를 주고자 동기부여의 계기를 책에서 찾고 있는 듯합니다. 자신을 연마하고 변화하려는 자세는 자기 성장에 있어 매우 중요하고 본질적인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 외부에 있는 미학적 가치’를 위한 자기계발은 어느 순간 의욕을 잃고 포기하기 쉽습니다. 즉, 자신에게 맞지 않는 자기계발은 중도에 멈추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는 마치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는 오래 걸을 수 없는 원리와 같습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삶을 꾸려나갑니다. 생존과 아름다움은 인간에게 있어 중요한 감정적, 이성적 동기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생존 본능을 자극하는 위협이 줄어든 반면, 아름다움에 대한 본능은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점차 내면이 아닌 감각기관을 통해 외부 자극에서 아름다움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화려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공유되며 동경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이를 모방하려는 경향이 생긴 것입니다. 결국, ‘그들의 삶’을 따라하려다 자신의 삶을 개조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자기계발은 단기적으로는 효과를 낼 수 있지만, 결국 포기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순서를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자신을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고, 자신이 추구하는 삶과 유사한 길을 걸어간 선배들의 삶을 참고하며, 자신의 스타일에 맞게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비로소 진정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The Limits of Aimless Self-Development

In both Korea and Japan, it’s common to see people gathering in the self-help sections of bookstores. Most of them seem to be seeking a source of motivation from books to bring about change in their lives. The attitude of refining and transforming oneself is essential and fundamental to personal growth.

However, self-development pursued for “external aesthetic values” often leads to losing motivation and giving up midway. In other words, self-development that doesn’t consider one’s own nature is more likely to end in failure—much like how wearing ill-fitting shoes makes it impossible to walk long distances.

Humans are driven by instinct to navigate life. The desire for survival and beauty serves as significant emotional and rational motivators. In today’s world, threats to survival have decreased, but the instinctual drive for beauty has grown stronger.

People have begun to seek beauty “outside themselves,” stimulated by external sources rather than inner reflection. As they admire the glamorous lives shared by others, they aspire to imitate “their lives” and attempt to remodel “their own lives.”

This kind of motivation for self-development might yield short-term results but often leads to abandonment in the long run. To overcome this, we need to revise the order of priorities. First, we should take time to understand ourselves, then look to the lives of those who have lived the kind of life we aspire to. By doing so, we can transform ourselves in a way that suits our personal style. When we shift this order, we can truly live a life that is authentic to ourselves.

目的のない自己啓発の限界

韓国でも日本でも、どの書店に行っても自己啓発書のコーナーにはいつも人が集まっているのを見かけます。多くの人は、自分の人生に変化をもたらすため、書籍から動機づけのきっかけを見つけようとしているようです。自分を鍛え、変化しようとする姿勢は、自己成長において非常に重要で本質的な態度だからです。

しかし、「自分の外にある美的価値」を追求するための自己啓発は、いつの間にか意欲を失い、途中で諦めてしまうことが多いのです。つまり、自分に合わない自己啓発は途中で挫折する可能性が高いのです。それは、足に合わない靴を履いて長時間歩けないのと同じ原理です。

人間は本能に従って生きています。生存と美しさは、人間にとって重要な感情的・理性的な動機づけとなります。現代社会では、生存本能を刺激する脅威は減少する一方で、美しさに対する本能はますます強まっています。

人々は、社会の流れの中で、自分の内面ではなく感覚器官を通じて外部の刺激から美しさを見つけ始めました。華やかな生活を送る人々の姿が共有され、それに憧れを抱き、「彼らの人生」を模倣しようとします。そして、「自分の人生」を改造しようとするのです。

このような自己啓発の動機づけは短期的には効果があるかもしれませんが、最終的には放棄してしまうことが多いのです。この順序を修正する必要があります。まずは自分を理解する時間を持ち、自分が目指す人生を歩んでいる先輩たちの人生を参考にしながら、自分のスタイルに合った変化を目指すべきです。このように順序を見直すことで、真の自分らしい人生を歩むことができるのです。

차별금지법: 자연스러움과 개인의 자유

인간 사회는 오랜 시간 동안 발전해 왔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개인과 사회는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해 왔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이지만, 200년 전만 해도 왕이 다스리던 철저한 계급사회였습니다. 그러나 한반도의 민족은 시대에 맞게 자연스럽게 변화해 왔습니다.

35년간의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난 대한민국은 6.25 전쟁과 민주화 운동을 통해 개인의 자유를 쟁취하고 민주주의 국가 체계를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수많은 개인의 희생과 국력의 증대를 통해 얻어진 소중한 유산입니다. 법치주의와 합리적인 개인 의견들이 모여 전 세계가 주목하는 사회를 이룩하게 된 것이죠.

이처럼 자연스럽게 형성된 사회적 관습과 개인의 자유로운 의견들은 국가 차원의 강요로 형성된 적이 없었습니다. 흔히 보수 세력이 주장하는 특정 인물의 정책이 중요해 보일 수 있지만, 사실 대한민국의 발전을 이끈 것은 국가 발전에 적극적으로 반응한 개인들입니다.

국가 권력은 크고 복잡하여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를 선도하거나 사회 자체를 변화시키기 어렵습니다. 최근 논란이 된 “포괄적 차별금지법안”은 오히려 개인의 자유와 사고를 왜곡할 가능성이 큽니다. 위에서부터 강요된 사회 변혁은 형식만 남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인간 사회는 매우 복잡하고, 예상치 못한 사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얽히고설킨 사회 문제들을 마주할 때마다 마음이 답답하고 두통이 시작되곤 합니다. 이러한 어려운 문제를 단순히 법안의 통과 여부에 맡긴다면, 우리는 새로운 사회 변화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애정을 가진 선배들이 만든 헌법에 부합하는 사회 변혁이 필요합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안은 헌법 조항에 충실한가, 입법으로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가, 사용된 용어들이 상식적으로 수용 가능한 개념인가, 법안의 실효성은 있는가, 그리고 국가인권위원회가 개인의 권리를 판단할 정통성 있는 기관인가, 아니면 사법부에서 판단해야 하는가 등의 다양한 질문을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때입니다.

원칙을 가진 개인들의 건전한 대화는 사회에 큰 유익을 줄 수 있습니다.

Anti-Discrimination Law: Naturalness and Individual Freedom

Human society has developed over long periods, adapting to new environments as individuals and communities evolved in various ways. Modern South Korea is a liberal democracy, but 200 years ago, it was a rigid class society ruled by monarchy. However, the Korean people have evolved naturally to align with the times.

After 35 years of colonial rule, South Korea won its independence, establishing individual freedoms and a democratic system through events like the Korean War and democratization movements. These freedoms are a precious heritage, earned through countless individual sacrifices and the nation’s growing strength. By establishing the rule of law and embracing rational perspectives, South Korea became a society that the world now admires.

The social customs and free opinions that developed naturally in South Korea were never imposed by a national framework. While certain political figures promoted by conservative groups may seem influential, it is, in reality, the responsive individuals who drove the country’s development.

Governmental power, due to its size and complexity, cannot easily lead or reshape society, which changes rapidly. The recently debated “Comprehensive Anti-Discrimination Bill” risks distorting individuals’ freedom and thought. Social change imposed from above is likely to be superficial and symbolic at best.

Human society is highly complex, filled with unpredictable events. When confronting interwoven social issues, we may feel overwhelmed and distressed. Reducing these problems to whether a law passes or fails could hinder our capacity to respond to evolving societal needs.

Now is the time to reflect on whether societal transformation aligns with the constitution created by those who genuinely cared about South Korea. Is the Anti-Discrimination Bill consistent with constitutional principles? Does it safeguard individual freedom through legislation? Are its definitions and terms reasonable and widely understandable? Are its provisions effective? And finally, is the National Human Rights Commission a legitimate body to determine individual rights, or should the judiciary undertake this role?

Constructive dialogue among individuals who uphold principles is beneficial for society.

전국민 25만원지원금

민생이 힘든 시민들을 위해 시민 정부는 어떠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전국민 25만원” 지급은 경제적으로 힘든 시민들을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설령 지급 방법이 현금이 아닌 지역사랑상품권이라도 개인에게는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얼핏 보면 합당하게 보이는 정책을 “국가의 부채 증가”, “이재명 명령”이라는 일반 시민들이 실감이 안 되는 이유들로 반대를 한들 여론을 설득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하지만 국민들을 위한 25만원 상당의 지급 정책은 섣부른 정치적 판단이라는 오명은 벗을 수 없다. 시민들의 경제적 상황이 힘들어진 이유는 너무나 복합적인 요인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세계 정치/경제에 영향을 많이 받는 한국의 경제적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문제를 개인의 영역에 한정지어 단순화했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 그리고 지급 방법과 지급 대상에 관한 사려 깊은 토론과 합의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좀 더 신중하고 깊이 있는 토론이 필요하다.

민주당의 정책의 의도와 결단은 힘든 경제적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는 시민들에게는 필요한 조치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의 과정은 아주 작은 단위의 공동체에서는 100퍼센트 올바른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경제적으로 힘든 자식을 가진 부모 또는 가정에서는 충분히 통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이러한 가정도 단순히 주는 것은 좋지 않을 경우도 있다) 하지만, 정책 결과의 수많은 경우의 수가 있을 경우에는 보다 신중하고 깊이 있는 태도가 요구된다. 이러한 정치적 신중함이 결여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반대를 한다.

25 Million Won National Support

It is natural for a civic government to take measures for citizens struggling with livelihood difficulties. Providing “25 million won per citizen” is one way to assist those facing economic hardship. Even if the distribution method is in the form of local love vouchers instead of cash, it still offers some help to individuals. And although the policy may seem reasonable at first glance, opposing it due to reasons like “increasing national debt” or “Lee Jae-myung’s order” does not effectively persuade the public.

However, the policy of providing 25 million won to citizens cannot escape the stigma of being a hasty political decision. The reasons behind the economic difficulties of citizens are highly complex. Given that South Korea’s economic structure is significantly influenced by global political and economic factors, it is problematic to simplify all issues to the individual level. Furthermore, there has been no careful discussion and agreement on the distribution method and the target recipients. More careful and in-depth discussions are necessary.

The Democratic Party’s intention and decision might have been one of the necessary measures for citizens living in tough economic conditions. However, such measures would have been a 100% correct decision in very small community units. For example, parents or families with economically struggling children would find it reasonable (though, in some cases, merely giving aid might not be beneficial). But when there are countless possible outcomes of a policy, a more careful and thoughtful approach is required. We oppose it due to the lack of such political prudence.

[BR] 기독교인의 자유

“우린 자유를 향한 영원한 갈망이 있다”

현대인의 삶은 부모 세대와는 사뭇 다른 형태를 띠고 있다. 예전에는 오늘날보다는 공동체적인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개인과 개인의 연결고리가 강했다. 공동체를 위한 개인에게 부과하는 조그마한 제약은 당연한 습관이었다. 그에 비해 요즘 세대는 그렇지 않다. 자신을 속박하는 어떠한 사상과 체계에도 위화감을 느끼는 감각을 가졌다. 개인으로서 좀 더 자유로운 삶을 꿈꾼다.

여기 종교개혁자 중에 한 명인 마틴 루터가 “자유”에 대해 설명한다. 기독교인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인간의 본질의 관점에 대한 설명으로 신자가 아니더라도 모두에게 좋은 질문을 던진다.

루터는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은 모든 것 위에 선 자유의 군주이며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

이렇게 선언한다. 얼마나 멋진 명제인가! 이 명제는 얼핏 보면 기독교 사상을 말하는 것 같지만 우리의 존재 자체가 그러한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우리는 의지를 원하는 것을 가지기 위해 움직일 수 있는 신체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인간의 기본적인 능력에 대해서 설명한다.

하지만 루터는 그러한 자유로운 존재의 위치를 가지고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이 진짜 자유라고 말하지 않는다.

“기독교인은 모든 사람의 종이며 누구에게나 종속된다”

우리의 본능은 자신만을 위해 살라고 한다. 본능에 거스르는 삶, 타인을 위해 사는 삶을 선택하는 자유야말로 본능에 종속된 자신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최고의 선택인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날 공동체적 의식이 약해지는 현상은 자신만을 위해 살고자 하는 자기 자신의 본능에 종속된 자유롭지 못한 상태를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

모순되는 두 명제는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던진다.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은 더 이상 진정한 자유로운 존재라고 말할 수는 없다. 자유라고 잘못된 판단한 욕망에 끌려가는 삶을 사는 것뿐이다.

진정한 자유는 가능할까요?

“We have an eternal yearning for freedom.”

The lives of modern people are quite different from those of the previous generation. In the past, there was a more communal tendency than today. Hence, the connections between individuals were strong. Small restrictions imposed on individuals for the sake of the community were considered natural habits. In contrast, today’s generation does not feel this way. They have a sense of discomfort with any ideology or system that restrains them. They dream of a freer life as individuals.

Here, Martin Luther, one of the religious reformers, explains “freedom.” Although he talks about Christians, his explanation regarding the essence of humanity poses good questions for everyone, whether they are believers or not.

Luther declares that Christians are:

“Christians are the free lords of all things and subject to no one.”

What a splendid proposition! At first glance, it seems to be talking about Christian ideology, but it actually speaks to the fact that our very existence holds such a position. We possess bodies that can move to obtain what our will desires. Luther explains this basic human ability.

However, Luther does not say that living solely for oneself with such a free position is true freedom.

“Christians are the servants of all and subject to everyone.”

Our instincts tell us to live for ourselves. Choosing a life that goes against these instincts, a life lived for others, is the highest choice that grants freedom to oneself, who is otherwise enslaved by instinct. Therefore, the weakening of communal consciousness today may indicate a state of unfreedom, enslaved by the instinct to live only for oneself.

These two contradictory propositions give us much to think about in our times. Living only for oneself can no longer be called a truly free existence. It is merely a life driven by desires mistakenly perceived as freedom.

Is true freedom possi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