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정신과 개인의 삶

그녀의 손가락은 굳은살 사이로 600그램 정도의 얇고 긴 창을 붙든다. 

“후하후하.”

창을 손에서 놓아야 할 마지노선 8미터 뒤에서 다리를 풀고 있다. 손과 발의 리듬이 우주의 질서에 맞먹을 정도의 조화를 이루지 않은 이상 제우스의 창은 자신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숨을 가다듬고 눈은 목표 지점보다 더 멀리 갈 수 있는 미래의 지점으로 던진다. 한 발자국 그다음 발자국에 가속을 더해 온 힘을 손에 집중시킨다. 그리고 그녀의 땀방울이 지면에 떨어지는 동시에 창은 그녀의 손에서부터 떨어져 65.80미터에 꽂힌다.

비록 TV를 통한 관람이지만 올림픽 선수들의 경기를 보면 선수들이 느끼는 긴장감이 전해져 옵니다. 그리고 마음속 어딘가에서 뜨거움이 올라옵니다. 그 열기는 우리 안에 큰 자극이 됩니다. 심지어는 새로운 자신을 발견할 정도로 우리의 몸속을 마구 휘저어 놓고 카오스 속에 질서를 만들어 가죠.

스포츠는 선수 당사자뿐만 아니라 보는 사람에게도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처음 실감합니다.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과 인상은 다르겠지만 열심히 경기하는 모습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긍정적인 생각의 씨앗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씨앗을 주워서 자신의 마음의 밭에 심을 수 있다면 스포츠는 올림픽의 진정한 의미를 발휘하는 것일 겁니다.

“보다 빠르게, 보다 높게, 보다 강하게(Citius, Altius, Fortius)”

올림픽 정신이 국가 중심의 정치적 관계로 인해 희석되고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삶의 원동력으로 삼아 또 다른 누군가에게 긍정의 씨앗을 뿌리는 선한 순환이 일어나기를 기대합니다.

The Olympic Spirit and Personal Life

Her fingers grip the thin, long javelin, weighing around 600 grams, between calluses. 

“Huff, huff.”

At the 8-meter mark, the point where she must release the javelin, she loosens her legs. Unless the rhythm between her hands and feet achieves a harmony that rivals the order of the universe, the javelin of Zeus will not demonstrate its true power. She steadies her breath, and her eyes fix not just on the target, but on a future point even farther. With each accelerating step, she channels all her strength into her hands. And just as a drop of her sweat hits the ground, the javelin leaves her hand and lands 65.80 meters away.

Even though I am watching through a television, the tension that the Olympic athletes feel is palpable. And somewhere deep inside, a warmth begins to rise. This heat stirs us deeply, becoming a powerful stimulus within. It even helps us discover a new self, as it sweeps through us, creating order out of chaos.

I realize for the first time that sports impact not only the athletes but also the spectators. While each person may have different feelings and impressions, most will find seeds of positive thoughts in the earnest efforts of the competitors. And if someone picks up those seeds and plants them in the field of their heart, then sports fulfill the true meaning of the Olympics.

“Faster, Higher, Stronger (Citius, Altius, Fortius)”

Though the Olympic spirit is being diluted by politically driven national interests, I hope that for someone, it becomes the driving force of their life, and that it initiates a virtuous cycle, sowing seeds of positivity in another.

상식을 바꾸는 개인의 힘

지금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

우리를 절망적인 상황까지 몰리게 한 사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요?

우리는 헤아릴 수도 없는 ‘사실’들에 둘러싸여 매일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종류도 다양해서 수량화할 수 없어서 공기와 같이 언제나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혼자 있을 때조차 감각기관을 통해 외부의 자극들을 계속해서 ‘사실’로 변환하며 만들고 있죠. 살아 있는 한 ‘사실’들은 생산되고 ’외부‘와 교류하며 변해갑니다.

어느 순간 공기와 같은 ’사실‘들 중 하나가 자신의 숨을 조여 옵니다. 그리고 ‘사실’의 유동성이 줄어들고 어느 순간 경직돼 버리죠. 우리의 감각기관은 서서히 마비가 됩니다. 외부와 관계가 끊어져 갑니다. 내 사고(思考)에 갇혀 버린 ’사실‘은 몸 안에서 이상 증상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렇게 우리는 서서히 병들어가죠.

우리를 둘러싼 ’사실‘, ‘사회적 사실’(뒤르켐이 말한 개념과는 조금 다르다)은 어디서 만들어질까요? 정확한 발원지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다수가 동의하는 ‘상식’은 개인들 사이에서 수용되고 변화되고 발신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돈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수 항목이야’

라는 사실은 국가나 사상(‘자본주의’)이 만든 것이 아니라 개인들이 자연스럽게 체득한 경험에서 도출한 상식이죠. 상식은 다수의 개인들이 ‘동의’한 특정 사실이기에 힘을 가지죠.

이러한 상식 중에는 개인의 삶을 절망으로 몰고 가는 사실도 있습니다. 하지만 상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고찰하면 내용은 시대에 따라 공간에 따라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개인에게 악영향을 주는 사실들을 바꿔가야 합니다. 목숨을 끊게 하는 사실이 아니라 다시 일어서도록 용기를 주는 사실이 상식이 되도록 스스로를 수양해야 합니다.

How are the “facts” that push them into such desperate situations created?

We live our daily lives surrounded by countless ‘facts.’ These facts are so diverse and innumerable that they seem to be ever-present like the air we breathe. Even when we are alone, our sensory organs continuously convert external stimuli into ‘facts.’ As long as we are alive, ‘facts’ are produced and change through interaction with the ‘external world.’

At some point, one of these ‘facts,’ like air, starts to choke us. The fluidity of ‘facts’ diminishes, and they become rigid. Our sensory organs gradually become paralyzed, and our connection with the outside world is severed. The ‘facts’ trapped in our minds cause abnormal symptoms within our bodies, leading us to gradually deteriorate.

Where do the ‘facts’ that surround us, the ‘social facts’ (slightly different from Durkheim’s concept), originate? While pinpointing their exact origin is impossible, we know that ‘common sense’ accepted by many is adopted, transformed, and transmitted among individuals.

The idea that ‘money is essential for living’ is not created by the state or ideology (such as ‘capitalism’) but is derived from the natural experiences of individuals. ‘Common sense’ holds power because it is a specific fact agreed upon by many individuals.

Some of these ‘common sense’ notions drive individuals into despair. However, by examining the process of how common sense is created, we can see that its content can change according to the times and spaces. We must transform the facts that negatively affect individuals. Instead of facts that lead people to take their own lives, we should cultivate facts that give them the courage to rise again, making such facts the new common sense.

역설의 진실

[마태복음 20:25-28]

성경은 끊임없이 역설을 선포하고 있는 책입니다. 세상에서 통하는 상식은 성경 앞에서는 경외감을 가진 채 고개를 숙여 중얼거립니다.

‘그건 현실적이지 않아. 그렇게 살면 바보 취급당할 거야.’

그리스도인조차 성경의 역설 앞에서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으니까요. 성경의 역설은 개인의 마음 한쪽에서 작은 말로 속삭입니다. 우리는 그 목소리가 마음 전체를 불편하게 하는 것을 방치할 수 없어서 소리의 발원을 두꺼운 철상자로 봉인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편안해지는 것처럼 느끼죠. 여기 하나의 역설이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럴 수 없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게 되고 싶은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 싶은 사람은 남의 종이 되어야 한다.”

상식이 말하는 권력의 형태는 위에서부터 밑으로, 최근에는 능력에 따른 역할 분담 등 구성원의 관계 속에서 언제나 “자신”으로부터 출발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철저히 “자신”을 버리는 삶을 선택하라고 합니다. “종”이 되라고 말할 정도니까요.

하나의 역설을 살펴보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역설이 세상을 덮으면 얼마나 아름다워질까라는 상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고 내일의 염려로 오늘을 불안해하지 않으며… 등의 역설들이 상식이 되는 세상은 지금보다는 여유롭고 살만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짧은 인생을 세상과 맞서 역설을 선택한다면 언젠가는 다음 세대의 상식은 좀 더 역설에 가까워지지 않을까요?

Paradox

The Bible is a book that constantly proclaims paradoxes. Common sense that prevails in the world bows its head in awe before the Bible and mumbles.

“That’s not realistic. If you live like that, you’ll be treated like a fool.”

Even Christians feel discomfort in the face of the Bible’s paradoxes. The paradoxes of the Bible whisper quietly in a corner of one’s heart. We cannot let this voice disturb our entire heart, so we seal its origin in a thick iron box. Then, we feel as if our hearts have become comfortable. Here is one such paradox.

“But it shall not be so among you. Whoever wants to become great among you must be your servant, and whoever wants to be first must be the slave of all.”

The form of power dictated by common sense flows from top to bottom, and recently, it has also involved role division according to abilities, always starting from “oneself” within the relationships of its members. However, the Bible tells us to thoroughly choose a life that abandons “oneself.” It goes as far as to tell us to become a “servant.”

We have examined one paradox, but sometimes I imagine how beautiful the world would become if the paradoxes proclaimed by the Bible covered it. If we regard others as better than ourselves and do not worry about tomorrow today… wouldn’t a world where such paradoxes become common sense be more relaxed and livable than now?

If we choose paradoxes against the world in our short lives, perhaps someday the common sense of the next generation will be closer to these paradoxes.

대북 확성기의 재개

7월 18-19일 이틀 동안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했다. 한국 정부가 북한의 날려 보내온 오물 풍선에 대한 빠른 조치였다. 확성기의 효과가 어느 정도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외부 위협에 대한 빠른 조치는 상대국에게 긴장감을 줌으로써 억제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생각해 보아야 하는 문제는 오물 풍선이 떨어진 시민 사회의 공간이다. 실제로 오물 풍선이 일상의 영역에서 떨어져 개인에게 피해가 끼치고 있다. 다행히 오물 풍선에 의해 자동차 앞유리가 파손된 개인은 보험 회사의 면책 규정에 의해서 보험금을 받고 다음 해의 보험료도 할증하지 받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정부는 오물 풍선에 대한 북한 정부에 대한 확고한 입장 발표와 동시에 국민들에게 충분한 설명을 해줄 의무가 있다. 대북 확성기의 재개는 국가적/군사적으로 빠른 조치였지만 시민 사회에 대한 조치는 다소 느리게 느껴진다. 대북 확성기의 재개와 동일하게 국민들에게도 정부의 입장 확성기를 설치해주기를 희망한다.

Resumption of Loudspeaker Broadcasts to North Korea

For two days, on July 18-19, South Korea resumed loudspeaker broadcasts to North Korea. This was a swift response by the South Korean government to the balloons filled with waste sent from North Korea. While the effectiveness of the loudspeakers is uncertain, rapid actions against external threats are believed to create tension for the opposing country, serving as a deterrent.

Another issue that needs consideration is the space within civil society where these waste balloons have landed. These balloons have fallen in everyday areas, causing personal damage. Fortunately, the individual whose car windshield was damaged by a waste balloon will receive compensation from their insurance company under the exemption clause, and their insurance premiums will not increase next year.

The government has a duty to make a firm statement to the North Korean government regarding the waste balloons and to provide a thorough explanation to the public. Although the resumption of the loudspeaker broadcasts was a prompt national and military response, the actions towards civil society feel somewhat delayed. Just as the government swiftly resumed the loudspeaker broadcasts, it is hoped that the government will also clearly communicate its stance to the public.

전국민 25만원지원금

민생이 힘든 시민들을 위해 시민 정부는 어떠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전국민 25만원” 지급은 경제적으로 힘든 시민들을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설령 지급 방법이 현금이 아닌 지역사랑상품권이라도 개인에게는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얼핏 보면 합당하게 보이는 정책을 “국가의 부채 증가”, “이재명 명령”이라는 일반 시민들이 실감이 안 되는 이유들로 반대를 한들 여론을 설득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하지만 국민들을 위한 25만원 상당의 지급 정책은 섣부른 정치적 판단이라는 오명은 벗을 수 없다. 시민들의 경제적 상황이 힘들어진 이유는 너무나 복합적인 요인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세계 정치/경제에 영향을 많이 받는 한국의 경제적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문제를 개인의 영역에 한정지어 단순화했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 그리고 지급 방법과 지급 대상에 관한 사려 깊은 토론과 합의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좀 더 신중하고 깊이 있는 토론이 필요하다.

민주당의 정책의 의도와 결단은 힘든 경제적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는 시민들에게는 필요한 조치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의 과정은 아주 작은 단위의 공동체에서는 100퍼센트 올바른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경제적으로 힘든 자식을 가진 부모 또는 가정에서는 충분히 통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이러한 가정도 단순히 주는 것은 좋지 않을 경우도 있다) 하지만, 정책 결과의 수많은 경우의 수가 있을 경우에는 보다 신중하고 깊이 있는 태도가 요구된다. 이러한 정치적 신중함이 결여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반대를 한다.

25 Million Won National Support

It is natural for a civic government to take measures for citizens struggling with livelihood difficulties. Providing “25 million won per citizen” is one way to assist those facing economic hardship. Even if the distribution method is in the form of local love vouchers instead of cash, it still offers some help to individuals. And although the policy may seem reasonable at first glance, opposing it due to reasons like “increasing national debt” or “Lee Jae-myung’s order” does not effectively persuade the public.

However, the policy of providing 25 million won to citizens cannot escape the stigma of being a hasty political decision. The reasons behind the economic difficulties of citizens are highly complex. Given that South Korea’s economic structure is significantly influenced by global political and economic factors, it is problematic to simplify all issues to the individual level. Furthermore, there has been no careful discussion and agreement on the distribution method and the target recipients. More careful and in-depth discussions are necessary.

The Democratic Party’s intention and decision might have been one of the necessary measures for citizens living in tough economic conditions. However, such measures would have been a 100% correct decision in very small community units. For example, parents or families with economically struggling children would find it reasonable (though, in some cases, merely giving aid might not be beneficial). But when there are countless possible outcomes of a policy, a more careful and thoughtful approach is required. We oppose it due to the lack of such political prud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