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한 대답을 들으면 안정감은 느낄지라도 상대방과 대화를 지속하고 싶지 않다.

일본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일본사회에는 수 많은 언어가 상황에 따라 정해져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決まり言葉”

(키마리코토바, 정해진 말, set phrase)

특히 회사원이라면 피부에 와닿을 정도로 정해진 말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거래처 사람에게 메일을 보낼때 서두에는 

“いつもお世話になっております”

(이쯔모오세와니낫떼오리마스, 항상 신세 지고 있습니다, appreciate your ongoing support)

꼭 이런 문구로 시작합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일본인의 “優しさ”(야사시사, 친절함, kindless)을 느낄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방을 지나치게 생각하는 언어 습관은 개인의 개성이 드러나지 못하게 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시킵니다. 특정 상황에서의 정해진 말은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생각보다 그 상황에 맞는 단어를 찾으려고 하는 사고의 습관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의 감정을 촉발시키는 “호기심”을 자극시키지 않는다. 즉, 뻔한 대답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인간적 감정을 배제시키는 동시에 대화의 즐거움을 뺏아버린다. 

자신만의 언어를 사용해 상대방에게 자신의 생각을 잘 전달 할수 있도록 우리는 훈련해야한다. 먼저는 가까운 사람들부터 해보는 거를 추천합니다. 오늘 저녁식사는 티비를 끄고 가족과 오늘 있었던 일들을 공유해봅시다.

냉동 식품과 생선구이의 절묘한 조합

⚪️タラ焼き (대구생선)

⚪️メンチカツ (멘츠카츠)-냉동식품

⚪️枝豆 (콩)-냉동식품

⚪️ふりかけ (치이카와-후리카케)


일본의 대표적인 감성, “도시락”

냉동식품을 몇개 사서 넣고 메인요리만 조리하면 간단한 도시락 완성! 도시락을 만든지도 1년이 넘었네요. 나름대로 요령도 생기고 요리도 늘었지만 아직 고수의 길은 멀고도 멉니다.

더욱 간단하게! 건강은 확실히! 애정도 듬뿍! 이러한 도시락을 만드는 그날까지

정착 외국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이점

최근 길을 걷다가 보면 외국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도로공사 주의요원으로 일하는 모습을 자주본다. 예전보다 더 많이 눈에 띈다. 같은 이방인의 입장에서 문화가 다른 일본땅에서 잘 정착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응원한다. 나도 많은 사람들의 응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종종 자국에 외국인들의 받아들이는 정책에 반대하는 집단들을 본다. 그들도 나름의 정당성을 표현하고 듣는 입장에서도 납득이 가는 부분도 있다. 예를 들면 범죄의 증가? 치안이 나빠진다? 등의 사실이다. 하지만 외국인의 적극적인 수용은 다양한 모습의 사회로 가는 계기가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인간은 누구라도 자신만의 세계관으로 가지고 있다. 설령 같은 나라 사람이라도 동일한 관습 속에서 전혀 다른 문화를 발견할 때가 있다. 반대로 국적이 다르더라도 비슷한 세계관을 가질 때가 있다. 자신의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풍토의 문화는 막강한 영향을 끼치는 거는 사실이다. 

하지만 관습을 초월하는 인간으로써 가지는 고유한 본성 또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글로벌 경제가 성립되는 이유이다. 누군가를 신뢰한다거나 거짓말하는 사람은 잘 믿지 못하거나 등의 인간이 가지는 공통적인 생각이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은 서로 교역 할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고유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가지는 고유한 본성의 존재는 외국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융화시키는데 중요한 기반이 된다. 외국인과 내국인의 차이는 언제나 개량 가능한 습관, 기호, 취미의 다름만 존재할 뿐이라는 거다. 이러한 생각을 염두해 두면 외국인과도 자연스럽게 교류를 할수 있다. 교류하는데 방해가 되는 점은 그들의 언어도 문화도 아니다. 자신 안에 있는 “편견”의 벽이다.(나는 편견이 무조건 나쁘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편견은 변할수 있는 속성을 가졌기에 진리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습관,기호,취미는 개량 가능하다

자신의 편견의 벽을 허무는 작업은 내외적으로 유익이 있다. 먼저 스스로에게는 자신의 세계관을 수정함으로써 자신의 인식이 확장 되는 것을 경험한다. 인식의 확장은 사회성을 세련하게 하고 개인/사회에서 잘 적응 해나갈수 있도록 한다. 다음은 외국인의 다른 문화를 수용함으로 인생의 즐거움을 증가시킨다. 전혀 다른 문화를 처음 접할때는 거부감이 드는건 당연하지만 점점 익숙해짐에 따라 문화에 흥미를 가지고 즐거움을 느낄것이다. 인간은 무언가를 알아가는 과정에 즐거움을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인식의 확장과 다른 문화의 수용은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외국인을 수용해야 하는 가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시민들도 납득해야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극적인 외국인의 수용은 한국사회를 윤택하게 하고 다양하게 만드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는 점을 잊어서도 안된다.

많은 문화가 어울려 질때 사회는 더욱 결속되고 관용의 정신이 퍼진다

예수님처럼 생각하자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예수님의 전체 삶을  다루는 문건은 잘 찾아볼수 없지만, 그의 공생애 기간(3년)동안의 행적은 알수 있다.

[마태복음]

1.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3:13-17)

2.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심(4:1-11)

3.가버나움에서 사심(4:12-16)

4.복음전파의 시작(4:17-26:)

5.붙잡힘과 십자가의 죽음(27:1-50)

6.부활과 승천(28)

예수님이 우리에게 남기신 것은 “총체적인 언어”이다. 문자적인 언어 뿐만아니라 그의 삶을 통한 “메세지”였다. 우리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며 실천하도록 명령 받았다. 간단하게 말해 우리는 주어진 삶에서 이 메세지를 받아들이고 평범함 속에서 특별함을 전하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예수님의 삶의 행적을 살펴보는 것이 유익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다.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어느 존재보다 확실한 예수님은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 예수님이 30살때 되던 해부터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했는데 그 전30년은 얼마나 인내의 시간이었을까 라고 한번 상상해본다.

다음은 예수님은 때가 되자 하나님의 음성에 따르면서 모든 사역을 시작했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이 세운 선지자의 세례로 사역을 시작한 것으로 보면 예수님 조차 하늘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삶을 살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겠는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받은 사명을 끝까지 지키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표는 이 세상의 가치와는 다른 좌표를 가진다. 그 좌표는 하늘을 향해 있기에 예수님말고는 이땅에서 온전히 이루기란 참 힘든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좌표가 하늘에 있어야 하는건 변하지 않는것 또한 사실이다. 거저 받은 구원을 끝까지 지키며 각 사람에게 나누어진 달란트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삶의 행적에서 엿볼수 있었다.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가면서 읽다가 보면 ‘나도 저렇게 할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때가 많다. 하지만 성경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거뜬히 할수 있다고 선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 모범되신 예수님 또한 늘 성령님을 의지했었다. 

늘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