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서 환희를 느끼시나요?

“눈물이 날 정도로 환희를 느낀 적이 있나요?”

저에게는 인생의 여러 시기에 많은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기억나는 장면은 한 장의 사진처럼 단편적이고 정적이지만 그 느낌은 확실히 떠오릅니다. 그리고 환희를 느끼게 하는 계기는 매번 달랐지만 감정을 느끼는 주체인 ‘나’는 동일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양하게 ‘보이는’ 현상들 속에 어떤 공통적 속성이 존재하고 거기에 내 감각이 반응해서 동일한 감정을 느낀 건 아닐까요? 이러한 경험적 추론에서 저는 제가 어디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고찰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의 감각이 언제 어디에 반응하는가?”

이 질문을 하면서부터 자신의 성향을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아! 나는 혼자 있을 때 안정감을 느끼는구나

아! 나는 누군가와 공통적인 주제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구나

아! 나는 책을 읽을 때의 만족감이 크구나

아! 나는 하나님을 경험할 때 환희를 느끼는구나

어릴 때부터 내가 모르는 사이에 축적된 감각의 지식과 성향은 현재의 나의 삶 속에서 여러 가지 생활패턴으로 나타납니다. 그중에서는 스스로가 만족하는 행동도 있을 것이고 고치고 싶은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자신이 ‘무엇에 즐거움을 느끼는지 파악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 알게 된다면 자신만의 방법으로 자신만의 장점을 끌어내면서 현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저도 MBTI를 해보고 대략적인 성향을 파악했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성향을 알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돌아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각자의 경험과 지식을 통해 얻은 즐거움이 각양각색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림자는 지나가고

봄의 그림자가 물러간 자리에
봄이 찾아왔다

민주화의 그림자가 물러간 자리에
자유가 찾아왔다

우리가 물러간 자리에
무엇이 그 자리를 매꿀까?

1절: 겨울이 끝날무렵 봄이 찾아온듯 따뜻한 날이 몇일 계속되었던 기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기간은 짧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매서운 북풍이 찾아왔습니다. 봄이 찾아온줄 착각했었습니다. 지금은 정말로 봄이 찾아왔습니다. 추위가 다시는 안올거라는 확신이 듭니다.

2절: 민주화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일까요? “개인의 자유”입니다. 민주주의 제도를 지키는 것 자체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착각하면 안됩니다.

3절: 우리 개인은 다음세대에 무엇을 남길까요? 민주화의 선배들이 소중히 여긴 민주주의 제도를 개선해가며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선”을 남겨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실제로 삶의 송두리째 변한 사람입니다

어릴 때부터 종종 받는 질문 중에 하나였습니다. 누군가에게 받는 경우도 있지만 스스로에게도 물어볼 때도 있었던 거 같아요. 어떤 때는 구체적인 직업과 그 활동의 내용을 인생의 목표로 삼은적도 있습니다. 또 어떨 때는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라이프스타일을 목표로 설정한 적도 있죠. 

어느 순간 환경이 변함에 따라 나의 목표가 계속 바뀐다는 거를 알게 되었어요. 목표가 매번 바뀐다는 사실을 깨닫는 나이가 될 때쯤에는 위의 질문이 무엇보다 덧없이 느껴지게 되죠. 

내 인생의 목표는 무엇이었지?

그래서 부모들의 목표는 “현실”이라고 표현되는 활동에 몰두하게 됩니다. 자녀교육, 여행, 건강 등이죠. 그렇다면 위의 질문은 인생의 일부분만 경험하고 있는 젊은 청년들에게만 가슴을 뜨겁게 하는 질문일까요? 

인생의 끝이 언제인지 알지 못하는 인간들에게는 어떤 목표를 설정하는 것은 처음부터 맨손으로 안개를 잡으려고 하는 것에 비유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필연적 탄생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우리의 존재는 태초부터 하나님의 고유한 목표 안에서 주체적인 삶을 향유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의 인생의 목표를 알 수있게 해주셨습니다. 우선순위가 엉망이 되었던 우리의 삶의 우선순위도 질서 있게 재배열해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욱 깊게 알고 싶은 열망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읽게 하고 기도를 하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세상 어떤 것보다 사랑하게 됩니다. 그 사랑은 배타적이지도 않으며 고정되어있지 않으며 유동적인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표현됩니다.

나이가 뜸에 따라 젊었을 때의 인생의 목표는 없어졌어요. 하지만 목표자체가 없어진 거는 아닙니다. 더욱 깊고 광범위한 목표를 얻었죠. 그 목표를 한 단어로 표현하면 “사랑”입니다.

국가는 최소한의 의무만 행하면 됩니다.

오늘 일본의 톱뉴스 중 하나인 

“工藤会トップ死刑破棄” 

(쿠도회 리더 사형파기)

위의 후쿠오카고등재판의 판결문은 ‘국가의 존재’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을 재고찰 하게 되었습니다.

쿠도회의 사건을 대략적으로 설명하자면 밑의 내용과 같습니다.

일본에서 “特定危険指定暴力団”(특정위험지정폭력단,야쿠자)은 자신들이 구역을 지키고 다른 폭력단들 간의 알력/투쟁을 하는 걸로 알려져 있어요. 하지만 “工藤会”(쿠도회)는 (폭력단과 관계가 없는) 일반 시민들을 상대로도 살인/폭력 등을 일삼는 폭력단으로써 유명합니다. 후쿠오카현에서의 4건의 일반시민을 상대로 한 습격 사건들로 인해 쿠도회의 리더는 체포되었죠. 체포된 후 살인을 저지른 범인과 쿠도회의 리더는 후쿠오카지방재판소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지만 1심 판결에 불복해서 항소했습니다. 2024년 3월 12일 후쿠오카고등재판소는 실제 범행을 저지른 자와 조직의 리더 간의 공모혐의가 인정되지 않는 이유로 1심의 ‘사형’을 파기하고 ‘무기징역’을 판결 내려졌습니다. 
위의 사건들과 판결의 내용은 일반 시민들에게 위협이 되는 폭력단을 국가가 형법 상 최고의 형인 사형을 내리지 않았다는 특정사건에 내포된 국가의 역할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국가는 시민들이 자연으로부터 주어진 최소한 조건들을 지키기 위해 존재합니다. 흔히 17-18세기 시민혁명의 이론이라고 알려진 사회계약설에 근거하고 있죠. 예를 들어 존 로크(John Locke, 1632)는 국가는 ‘생명, 자유, 재산’이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시민들 간의 계약을 통해 근대국가가 탄생했다라고 말했죠. 즉 국가의 궁극적인 존재 이유는 시민들의 기본적 인권을 지키기 위한 것이며 국가는 항시 변할 수 있는 통치기구에 불가하다는 것입니다.

국가의 관습과 제도를 형성하고 기반이 되는 법률은 시대의 정신에 따라 해석이 달라집니다. 예를 들면 현재 한국은 흉악 범죄자에 대해 사형을 판결하지만 집행을 하지는 않죠. 사형을 집행하지 않는 이유는 현대에 들어서 “인권”에 대한 해석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비록 다른 나라의 예지만 “쿠도회”의 판결을 보면 일본 국가는 시민들이 일상을 영위하는 데 있어서 최소한의 권리를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는 예를 보여주었습니다. 당연히 시대의 정신에 따라 법률의 해석은 달라져야지만, 시민들의 ‘생명, 자유, 재산’을 지키기 위한 국가의 기본적인 의무는 어떠한 시대이라도 가장 우선되어야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최근 한국정부는 시민들의 모든 일상을 지켜주고 편리성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보다 교육, 의료 서비스는 최고 수준의 서비스를 받고 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일본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쾌적한 행정 서비스는 한국은 몇 년 전부터 시민들에게 제공하고 있었죠. 정말 감사한 일이죠. 하지만, 국가 주도의 화려한 정책들 뒷면에 국가는 기본적인 의무인 개인의 ‘생명, 자유, 재산’을 지키고 있는지 고찰되어야 합니다.

특정 정당 및 정치가에게 기대를 품는 정치적 풍조는

개인들의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정신을 뺏아가고 있지 않은가?

오늘의 고찰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공통점

부엌의 싱크대가 부서져서 보수를 한다고 가정해 보자. 당연히 지금까지 썼던 싱크대와 같은 모델로 구입해서 설치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순간

”최근 설거지가 많이 늘어서 체력적으로 힘든데 식기세척기도 추가할까? “

라는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그리고 기존에 설치되었던 모델보다는 최신형 싱크대를 찾아본다. 

‘식기세척도 가능한 싱크대’!

비록 싱크대만 고장 났지만 부엌 전체를 리모델링하는 가능성(선택)도 존재한다. 아니면 집 전체 구조를 바꾸고 리폼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조금 더 개선된 싱크대’ 정도의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게 지극히 자연스럽다.

흔히 어떤 사회 문제에 직면했을 때 보수주의자들은 지금까지 것들을 ‘지키려고 한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미 균열이 생긴 사회문제를 보수할 때는 어떠한 형태로든 기존의 제도를 개선시키는 방향으로 사고가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식기세척기가 달린 싱크대’

이 생각이 기본적인 보수주의자들의 사고다. 얼마나 지극히 인간적이고 리얼한 선택인가?!

(그렇다고 진보주의자들도 집 전체 구조를 바꾸려고 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들 사이에 아직 서로 알지 못하는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그것도 사적인 이익이 아닌 공적인 이익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