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실제로 삶의 송두리째 변한 사람입니다

어릴 때부터 종종 받는 질문 중에 하나였습니다. 누군가에게 받는 경우도 있지만 스스로에게도 물어볼 때도 있었던 거 같아요. 어떤 때는 구체적인 직업과 그 활동의 내용을 인생의 목표로 삼은적도 있습니다. 또 어떨 때는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라이프스타일을 목표로 설정한 적도 있죠. 

어느 순간 환경이 변함에 따라 나의 목표가 계속 바뀐다는 거를 알게 되었어요. 목표가 매번 바뀐다는 사실을 깨닫는 나이가 될 때쯤에는 위의 질문이 무엇보다 덧없이 느껴지게 되죠. 

내 인생의 목표는 무엇이었지?

그래서 부모들의 목표는 “현실”이라고 표현되는 활동에 몰두하게 됩니다. 자녀교육, 여행, 건강 등이죠. 그렇다면 위의 질문은 인생의 일부분만 경험하고 있는 젊은 청년들에게만 가슴을 뜨겁게 하는 질문일까요? 

인생의 끝이 언제인지 알지 못하는 인간들에게는 어떤 목표를 설정하는 것은 처음부터 맨손으로 안개를 잡으려고 하는 것에 비유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필연적 탄생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우리의 존재는 태초부터 하나님의 고유한 목표 안에서 주체적인 삶을 향유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의 인생의 목표를 알 수있게 해주셨습니다. 우선순위가 엉망이 되었던 우리의 삶의 우선순위도 질서 있게 재배열해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욱 깊게 알고 싶은 열망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읽게 하고 기도를 하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세상 어떤 것보다 사랑하게 됩니다. 그 사랑은 배타적이지도 않으며 고정되어있지 않으며 유동적인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표현됩니다.

나이가 뜸에 따라 젊었을 때의 인생의 목표는 없어졌어요. 하지만 목표자체가 없어진 거는 아닙니다. 더욱 깊고 광범위한 목표를 얻었죠. 그 목표를 한 단어로 표현하면 “사랑”입니다.

국가는 최소한의 의무만 행하면 됩니다.

오늘 일본의 톱뉴스 중 하나인 

“工藤会トップ死刑破棄” 

(쿠도회 리더 사형파기)

위의 후쿠오카고등재판의 판결문은 ‘국가의 존재’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을 재고찰 하게 되었습니다.

쿠도회의 사건을 대략적으로 설명하자면 밑의 내용과 같습니다.

일본에서 “特定危険指定暴力団”(특정위험지정폭력단,야쿠자)은 자신들이 구역을 지키고 다른 폭력단들 간의 알력/투쟁을 하는 걸로 알려져 있어요. 하지만 “工藤会”(쿠도회)는 (폭력단과 관계가 없는) 일반 시민들을 상대로도 살인/폭력 등을 일삼는 폭력단으로써 유명합니다. 후쿠오카현에서의 4건의 일반시민을 상대로 한 습격 사건들로 인해 쿠도회의 리더는 체포되었죠. 체포된 후 살인을 저지른 범인과 쿠도회의 리더는 후쿠오카지방재판소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지만 1심 판결에 불복해서 항소했습니다. 2024년 3월 12일 후쿠오카고등재판소는 실제 범행을 저지른 자와 조직의 리더 간의 공모혐의가 인정되지 않는 이유로 1심의 ‘사형’을 파기하고 ‘무기징역’을 판결 내려졌습니다. 
위의 사건들과 판결의 내용은 일반 시민들에게 위협이 되는 폭력단을 국가가 형법 상 최고의 형인 사형을 내리지 않았다는 특정사건에 내포된 국가의 역할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국가는 시민들이 자연으로부터 주어진 최소한 조건들을 지키기 위해 존재합니다. 흔히 17-18세기 시민혁명의 이론이라고 알려진 사회계약설에 근거하고 있죠. 예를 들어 존 로크(John Locke, 1632)는 국가는 ‘생명, 자유, 재산’이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시민들 간의 계약을 통해 근대국가가 탄생했다라고 말했죠. 즉 국가의 궁극적인 존재 이유는 시민들의 기본적 인권을 지키기 위한 것이며 국가는 항시 변할 수 있는 통치기구에 불가하다는 것입니다.

국가의 관습과 제도를 형성하고 기반이 되는 법률은 시대의 정신에 따라 해석이 달라집니다. 예를 들면 현재 한국은 흉악 범죄자에 대해 사형을 판결하지만 집행을 하지는 않죠. 사형을 집행하지 않는 이유는 현대에 들어서 “인권”에 대한 해석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비록 다른 나라의 예지만 “쿠도회”의 판결을 보면 일본 국가는 시민들이 일상을 영위하는 데 있어서 최소한의 권리를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는 예를 보여주었습니다. 당연히 시대의 정신에 따라 법률의 해석은 달라져야지만, 시민들의 ‘생명, 자유, 재산’을 지키기 위한 국가의 기본적인 의무는 어떠한 시대이라도 가장 우선되어야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최근 한국정부는 시민들의 모든 일상을 지켜주고 편리성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보다 교육, 의료 서비스는 최고 수준의 서비스를 받고 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일본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쾌적한 행정 서비스는 한국은 몇 년 전부터 시민들에게 제공하고 있었죠. 정말 감사한 일이죠. 하지만, 국가 주도의 화려한 정책들 뒷면에 국가는 기본적인 의무인 개인의 ‘생명, 자유, 재산’을 지키고 있는지 고찰되어야 합니다.

특정 정당 및 정치가에게 기대를 품는 정치적 풍조는

개인들의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정신을 뺏아가고 있지 않은가?

오늘의 고찰

뻔한 대답을 들으면 안정감은 느낄지라도 상대방과 대화를 지속하고 싶지 않다.

일본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일본사회에는 수 많은 언어가 상황에 따라 정해져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決まり言葉”

(키마리코토바, 정해진 말, set phrase)

특히 회사원이라면 피부에 와닿을 정도로 정해진 말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거래처 사람에게 메일을 보낼때 서두에는 

“いつもお世話になっております”

(이쯔모오세와니낫떼오리마스, 항상 신세 지고 있습니다, appreciate your ongoing support)

꼭 이런 문구로 시작합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일본인의 “優しさ”(야사시사, 친절함, kindless)을 느낄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방을 지나치게 생각하는 언어 습관은 개인의 개성이 드러나지 못하게 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시킵니다. 특정 상황에서의 정해진 말은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생각보다 그 상황에 맞는 단어를 찾으려고 하는 사고의 습관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의 감정을 촉발시키는 “호기심”을 자극시키지 않는다. 즉, 뻔한 대답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인간적 감정을 배제시키는 동시에 대화의 즐거움을 뺏아버린다. 

자신만의 언어를 사용해 상대방에게 자신의 생각을 잘 전달 할수 있도록 우리는 훈련해야한다. 먼저는 가까운 사람들부터 해보는 거를 추천합니다. 오늘 저녁식사는 티비를 끄고 가족과 오늘 있었던 일들을 공유해봅시다.

정착 외국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이점

최근 길을 걷다가 보면 외국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도로공사 주의요원으로 일하는 모습을 자주본다. 예전보다 더 많이 눈에 띈다. 같은 이방인의 입장에서 문화가 다른 일본땅에서 잘 정착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응원한다. 나도 많은 사람들의 응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종종 자국에 외국인들의 받아들이는 정책에 반대하는 집단들을 본다. 그들도 나름의 정당성을 표현하고 듣는 입장에서도 납득이 가는 부분도 있다. 예를 들면 범죄의 증가? 치안이 나빠진다? 등의 사실이다. 하지만 외국인의 적극적인 수용은 다양한 모습의 사회로 가는 계기가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인간은 누구라도 자신만의 세계관으로 가지고 있다. 설령 같은 나라 사람이라도 동일한 관습 속에서 전혀 다른 문화를 발견할 때가 있다. 반대로 국적이 다르더라도 비슷한 세계관을 가질 때가 있다. 자신의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풍토의 문화는 막강한 영향을 끼치는 거는 사실이다. 

하지만 관습을 초월하는 인간으로써 가지는 고유한 본성 또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글로벌 경제가 성립되는 이유이다. 누군가를 신뢰한다거나 거짓말하는 사람은 잘 믿지 못하거나 등의 인간이 가지는 공통적인 생각이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은 서로 교역 할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고유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가지는 고유한 본성의 존재는 외국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융화시키는데 중요한 기반이 된다. 외국인과 내국인의 차이는 언제나 개량 가능한 습관, 기호, 취미의 다름만 존재할 뿐이라는 거다. 이러한 생각을 염두해 두면 외국인과도 자연스럽게 교류를 할수 있다. 교류하는데 방해가 되는 점은 그들의 언어도 문화도 아니다. 자신 안에 있는 “편견”의 벽이다.(나는 편견이 무조건 나쁘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편견은 변할수 있는 속성을 가졌기에 진리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습관,기호,취미는 개량 가능하다

자신의 편견의 벽을 허무는 작업은 내외적으로 유익이 있다. 먼저 스스로에게는 자신의 세계관을 수정함으로써 자신의 인식이 확장 되는 것을 경험한다. 인식의 확장은 사회성을 세련하게 하고 개인/사회에서 잘 적응 해나갈수 있도록 한다. 다음은 외국인의 다른 문화를 수용함으로 인생의 즐거움을 증가시킨다. 전혀 다른 문화를 처음 접할때는 거부감이 드는건 당연하지만 점점 익숙해짐에 따라 문화에 흥미를 가지고 즐거움을 느낄것이다. 인간은 무언가를 알아가는 과정에 즐거움을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인식의 확장과 다른 문화의 수용은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외국인을 수용해야 하는 가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시민들도 납득해야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극적인 외국인의 수용은 한국사회를 윤택하게 하고 다양하게 만드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는 점을 잊어서도 안된다.

많은 문화가 어울려 질때 사회는 더욱 결속되고 관용의 정신이 퍼진다

예수님처럼 생각하자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예수님의 전체 삶을  다루는 문건은 잘 찾아볼수 없지만, 그의 공생애 기간(3년)동안의 행적은 알수 있다.

[마태복음]

1.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3:13-17)

2.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심(4:1-11)

3.가버나움에서 사심(4:12-16)

4.복음전파의 시작(4:17-26:)

5.붙잡힘과 십자가의 죽음(27:1-50)

6.부활과 승천(28)

예수님이 우리에게 남기신 것은 “총체적인 언어”이다. 문자적인 언어 뿐만아니라 그의 삶을 통한 “메세지”였다. 우리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며 실천하도록 명령 받았다. 간단하게 말해 우리는 주어진 삶에서 이 메세지를 받아들이고 평범함 속에서 특별함을 전하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예수님의 삶의 행적을 살펴보는 것이 유익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다.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어느 존재보다 확실한 예수님은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 예수님이 30살때 되던 해부터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했는데 그 전30년은 얼마나 인내의 시간이었을까 라고 한번 상상해본다.

다음은 예수님은 때가 되자 하나님의 음성에 따르면서 모든 사역을 시작했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이 세운 선지자의 세례로 사역을 시작한 것으로 보면 예수님 조차 하늘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삶을 살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겠는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받은 사명을 끝까지 지키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표는 이 세상의 가치와는 다른 좌표를 가진다. 그 좌표는 하늘을 향해 있기에 예수님말고는 이땅에서 온전히 이루기란 참 힘든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좌표가 하늘에 있어야 하는건 변하지 않는것 또한 사실이다. 거저 받은 구원을 끝까지 지키며 각 사람에게 나누어진 달란트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삶의 행적에서 엿볼수 있었다.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가면서 읽다가 보면 ‘나도 저렇게 할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때가 많다. 하지만 성경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거뜬히 할수 있다고 선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 모범되신 예수님 또한 늘 성령님을 의지했었다. 

늘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