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레스 오블리주

자연적 귀족의 시대

프랑스 혁명 이후 서구권 시민들의 인권은 크게 향상되어 봉건시대적 계층간의 구분은 표면적으로 점점 없어져 왔습니다. 뒤늦게 근대화를 이룬 한국에서도 서양의 시민사회의 정신을 수용하면서 조선시대의 사회 계층구조는 찾아 볼수 없게 되었습니다. 더나아가 민주주의 시대의 도래로 인해 시민의 힘은 어느 권력도 무시 못하게 되었죠.

하지만 인간에는 다양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에 권력의 상하의 계층구분은 사라졌지만 사회적 위치의 다양함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즉 비합리적으로 점령한 사회적 위치는 소멸되었지만 개개인의 능력에 따른 사회적 지위는 유지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시민사회를 이끄는 사람으로 누군가는 명령에 충성하는 자로 여러 모습들이 존재 하는 것이죠. 아주 자연스러운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최근 채상병 사건에 대응한 사단장의 녹취록에서 우리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물에 빠진 채상병의 사고를 보고 받은 사단장의 발언은 머릿 속에 자신의 안위만 생각한것 같은 대답이었기 때문이죠. 한 사단을 거느르는 지휘자의 마음가짐에 가져야할 덕목이 결핍되어있었습니다. 자신의 부대에 대한 “애착”과 “충성”을 상실한채 지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번 사건으로 무능력으로 얻은 사회적 위치의 문제점이 여실이 드러났습니다. 지휘관으로써 가져야할 덕목을 가지지 않은채 어떻게 사단장이 될수 있었던가 라는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우리 사회의 리더들은 어떤 덕목을 가져야 하는가를 재고를 해야할 시기가 왔습니다. 

서구의 귀족들이 가졌던 “노블레스 오블리주”에서 찾아 볼수 있습니다. 또한 공자라 말한 “인애” 사상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리더들이 보이지 않지만 위기의 상황에서 발휘하는 가치관들을 소유한다면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권리와 권력을 일시적으로 양도할 거라고 믿습니다.


“After the French Revolution, the rights of Western citizens greatly improved, and the distinctions between feudal classes have gradually disappeared on the surface. In Korea, which achieved modernization later, the social hierarchy of the Joseon Dynasty has vanished as the spirit of Western civil society was adopted. Furthermore, with the advent of the democratic era, the power of the citizens has become something that no authority can ignore.

However, as humans are beings born with various abilities, while hierarchical divisions of power have disappeared, the diversity of social positions still exists. In other words, while irrationally occupied social positions have vanished, social status according to individual abilities remains. Some people lead civil society, while others serve loyally in various roles. This is a very natural aspect of a community.

In the recent case involving Corporal Chae, we saw a lack of the spirit of ‘noblesse oblige’ in the recording of the division commander’s response. The commander’s remarks upon receiving the report of Corporal Chae’s drowning seemed to reflect only concern for his own safety. He lacked the virtues that a leader of a division should possess, having lost ‘affection’ and ‘loyalty’ to his unit.

This incident starkly revealed the problem of obtaining social positions through incompetence. It raises the question of how someone who lacks the virtues necessary for a commander could become a division commander. It is time for us to reconsider the virtues that our society’s leaders should have.

We can find guidance in the ‘noblesse oblige’ of Western aristocrats and in Confucius’s idea of ‘benevolence.’ If leaders possess values that may not be visible but are demonstrated in times of crisis, citizens will naturally feel inclined to temporarily delegate their rights and power.”

사법부의 고민

한국 사법부의 고민

한국인은 싸울 때 하는 말 중 종종 듣는 문구가 있다.

“법대로 해!”

그래서 인지 무슨 일만 일어나도 소송 등의 법적 조치를 취하려고 한다. 모든 사회적 사항에 관한 결정을 사법부에 맡긴다. 특히나 정책에 관한 정치적 문제의 해결 과정 또한 사법부의 결정만 바라보고 있다. 

언론에서는 이번 의대 증원에 대해서 서울 고등행정 법원의 판결에 주목하고 있다. ‘의대 증원에 대한 정부의 정책결정의 효력을 정지’에 관한 집행의 판결이다. 사법부의 판결로 인해 의대 증원은 결정이 되는 구조처럼 보인다. 

법률에 대한 최종판단을 하는 사법부는 어디까지나 법률에 관한 사항에서 만 최종 권위를 가진다. 특정 법률에 대한 영향이 시민사회에 얼마만큼의 파급력을 있는지 없는지는 또다른 영역에서 고찰해야지 법률 속에서만 판단하는 사법부에게는 정치적 사항에 판결은 너무나 어려운일이다. 즉 정치적 판단이 필요 하는 사항에 대해서까지 사법부의 주목은 필요없다.

시민사회에서의 사법부의 역할을 재고찰 해야한다. 오늘날 시민사회의 기본 틀인 법률에 대한 이성적 판단을 내리는 사법부에 비겁한 정치인들에게 이용당하고 있지 않은지 질문을 던져 본다.

Asia is facing threats to individual freedom.

Today’s Cartoon in Asia

“The power of the state is exerting a significant influence on individuals’ lives. Decreases in corporate income due to misguided policies directly impact individuals. Personal freedoms are gradually being eroded, even affecting the meals of our children…”

자신이 쌓아온 편견의 벽을 부수는 용기

저에게는 세대가 전혀 다른 친한 친구가 한 명 있습니다. 같은 대학원 연구과 동기로서 현재까지도 정기적으로 교류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죠. 누군가에게 아버지 세대라고 소개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나이 차이가 납니다. 하지만 나는 이 친구랑 이야기가 잘 통해요. 한 번은 같이 해외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정말 편하게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눴던 것이 기억납니다.

흔히 세대가 차이가 난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이야기가 잘 안 통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 요인이 “시간적 나이”에만 있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저와 대학원 동기는 어떻게 이야기가 잘 통하는 걸까요?

그 이유는 “개인적”으로 공유하는 문화와 세계관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역사가 정한 시간의 순서가 아닌 각 “개인이 선택한 시간의 순서”가 자연스럽게 서로 맞아떨어졌습니다. 예를 들면 개인과 사회의 두 관계의 밸런스에 대한 의견이 비슷한 점입니다. 서로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극단적인 집단주의에 대해서 국적과 살아온 시대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선택한 행위와 그 습관이 닮아 있었습니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전 세대와 세대차이로 인해 대화가 단절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그 요인은 자연이 정해놓은 시간의 순서에 영향을 받기 쉽습니다. 하지만 현대에 있어서 세대 간의 생각 차이의 격차가 벌어지는 이유에는 다른 요인의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과 개인이 각기 쌓아온 문화의 벽을 부수는 노력이야말로 다양한 사회를 향하는 유일하고 유효한 방법입니다.

break down the cultural walls built

I have a close friend who belongs to a completely different generation. As graduate school research colleagues, we are still regularly in touch. There is such a significant age difference that it wouldn’t be awkward to introduce him as someone from my father’s generation. However, I have great conversations with this friend. I remember a time when we went on a trip abroad together and talked endlessly and comfortably.

People often interpret generational differences as a reason for poor communication. But is the main factor really just “age”? If so, how do my graduate school colleague and I manage to communicate so well?

The reason is that we share similar cultures and worldviews on a personal level. It’s not the chronological order set by history, but rather the “individually chosen order of time” that aligns naturally. For example, our opinions on the balance between individuality and society are quite similar. Despite the differences in nationality and the eras we lived through, our chosen actions and habits resemble each other.

In Korea and Japan, we often hear about generational gaps leading to communication breakdowns. This is largely influenced by the natural order of time. However, in modern times, I believe there are other factors that contribute to the widening gap in generational thinking. Efforts to break down the cultural walls built by individuals are the only and most effective way towards a more diverse society.

어디에서 환희를 느끼시나요?

“눈물이 날 정도로 환희를 느낀 적이 있나요?”

저에게는 인생의 여러 시기에 많은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기억나는 장면은 한 장의 사진처럼 단편적이고 정적이지만 그 느낌은 확실히 떠오릅니다. 그리고 환희를 느끼게 하는 계기는 매번 달랐지만 감정을 느끼는 주체인 ‘나’는 동일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양하게 ‘보이는’ 현상들 속에 어떤 공통적 속성이 존재하고 거기에 내 감각이 반응해서 동일한 감정을 느낀 건 아닐까요? 이러한 경험적 추론에서 저는 제가 어디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고찰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의 감각이 언제 어디에 반응하는가?”

이 질문을 하면서부터 자신의 성향을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아! 나는 혼자 있을 때 안정감을 느끼는구나

아! 나는 누군가와 공통적인 주제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구나

아! 나는 책을 읽을 때의 만족감이 크구나

아! 나는 하나님을 경험할 때 환희를 느끼는구나

어릴 때부터 내가 모르는 사이에 축적된 감각의 지식과 성향은 현재의 나의 삶 속에서 여러 가지 생활패턴으로 나타납니다. 그중에서는 스스로가 만족하는 행동도 있을 것이고 고치고 싶은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자신이 ‘무엇에 즐거움을 느끼는지 파악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 알게 된다면 자신만의 방법으로 자신만의 장점을 끌어내면서 현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저도 MBTI를 해보고 대략적인 성향을 파악했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성향을 알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돌아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각자의 경험과 지식을 통해 얻은 즐거움이 각양각색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